cogitum.egloos.com

코지토의 세상분해하기 Season 2

포토로그



<설국열차> 봉준호의 절망? 혹은 절망의 봉준호? 14



<인류의 "희망"과 "희망의 아버지">



1.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설국열차를 한번 진지하게 뒤져볼까 합니다. 앞서 두 꼭지 글을 썼지만 다소 가벼운 글이었어요. 이제 영화의 열기도 많이 가라 앉고 했으니 살짝 거리두기가 가능한 사람들도 늘어날 거 같아 제법 진지한 내용도 올려볼까 합니다.

우선 기본 전재를 말할께요. 이번 글에는 영화 자체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이 영화는 영화 자체로서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없어요. 잘해봐야 실패한 상업영화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말할지도 몰라요. 아니 관객 800만을 모으고 있는 영화가 실패작이냐? 네, 전 그렇다고 봅니다. 중국에서 역대급 성적을 낸 몇몇 영화를 우리가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지 않죠. 영화의 질과 완성도와 따로 노는 국지적인 마케팅의 산물이거든요.

<D워>도 800만이 넘는 관객을 모았지만 진지하게 영화의 작품성을 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설국열차>의 완성도는 디워와 비교하기는 어렵죠. 담고 있는 메시지의 심각성도 디워와 비할 수는 없죠. 그러나 메시지의 심각성이 영화의 질을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심각한 메시지를 담은 엉성한 영화의 숫자를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이번 글은 영화 자체의 질은 문제삼지 않고 오히려 그 안의 메시지의 문제를 한번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2. 허지웅의 엉터리 영화읽기

이 영화를 통해 새삼 깨달은 것은 봉준호라는 이름의 위대함이이에요. 혹 오해를 살까 미리 밝히는 바, 난 봉준호를 무척 좋아합니다. 봉준호의 모든 작품을 다 보았고 그 중 호오의 경중은 있을지언정 실망한 작품은 없었어요. 그러나 <설국열차>는 큰 실망감을 안겨 주네요. 봉준호의 작품 중에서 현실 풍자가 없고 비판 메시지가 없는 작품은 없었어요. 그러나  메시지의 무게로 서사와 캐릭터가 무너지는 작품은 <설국열차>가 처음입니다. 실망감은 여기서 비롯되었어요. 그러나 더 큰 실망감은 오히려 이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의 불길함 때문입니다.


허지웅은 이 작품에서 희망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희망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말하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그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같습니다(여기서 허지웅의 리뷰를 예로 든 것은 별 다른 뜻이 없어요, 다들 헛소리를 하고 있지만 그 헛소리가 가장 집약되어 나타난 리뷰로서 마침 내 눈에 들어왔을 뿐입니다).

허지웅은 이 영화가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를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 다름 아닌 가능성”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영화 외적인 출연진의 요소까지 들먹이며 자신이 읽은 메시지를 역설해요. 그러면서 말합니다. 이 영화가 체제의 유지와 역전이 아닌 체제 자체의 포기를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자, 그러면 묻고 싶어요.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체제를 포기하게 되는가? 그리고 그 대가는 무엇인가? 그리고 봉준호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이 체제의 포기를 주장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그 주장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인가?

허지웅 뿐 아니라 모든 평론가가 이 지점에서 침묵합니다. 그들이 읽은 이 영화의 메시지가 그야말로 우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우화적이고 해피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봉준호는 지금 시대의 상황에 압도적인 절망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이 불길함이 내내 나를 괴롭히네요.


3. 봉준호가 던지는 희망의 정체

봉준호와 허지웅이 희망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를 한번 살펴보자구요. 그리고 이 영화가 설정한 메타포를 일단 모두 받아들여 봅시다. 그 은유가 설득력있는 것인지는 논외로 하고 말입니다.

기차는 하나의 세계, 그리고 각 칸은 계급을 의미한다. 기차는 끊임없이 달리고 있고 그 기차가 서는 순간 인류는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인류는 살고 있다. 즉, ‘달리는 기차’라는 것은 멈출 수 없는 체재, 지금 우리의 상황를 의미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가장 아래 바닥에 속한 꼬리칸 사람들은 낙수효과에 의존하여 하루 하루 살아가고 불만속에서 혁명을 꿈꾸지만 그들 역시 사실은 이 체재의 유지 공모에 가담하고 있는 것뿐이다. 혹, 누가 이 단계에서 이탈하여 먹이피라미드 위로 올라간다고 해도 기차는 계속 달리고 있을 뿐이며 엔진의 스위치를 누르는 손이 바뀐 거 뿐이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커티스는 그 달리는 것 자체, 그리고 기차의 폐쇄된 상황 자체, 즉 체재 자체를 폭파하고자 시도한다. 그 우발적 시도로 모두가 죽고 두 아이가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들은 새 인류의 희망을 상징한다(절대 북극곰의 먹이가 되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이 영화가 의미하는 메시지의 요약본이에요. 그 밖에 다른 읽을거리도 물론 있지만 생략할께요. 여기서 우리가 판단해야 하는 것은 사실 단순합니다. 이 영화는 너무나 닫힌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관객의 상상력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조차 매우 작아요. 즉, 이 “희망”의 메시지에 찬성하느냐, 혹은 반대하느냐. 그 밖의 대답은 놓일 자리가 없죠. 사실 그 예스와 노 사이에 놓인 무한한 가능성을 모두 닫아 버렸으니까요.(혹은 뻥뻥 뚫린 설정을 메우는데 모든 상상력을 다 동원해서 결말이 던지는 메시지까지 생각조차 못할 수도 있겠네요).

영화의 빈약한 서사구조와 느슨한 리듬때문에 이런 메시지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관객도 있을겁니다. 영화 자체가 재미가 없는데 누가 영화의 내용을 생각하겠어요. 그러나 우격다짐으로 던지는 저 메시지를 읽지 못하는 관객은 사실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언어화 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저렇게 올라가서 뒤집어야 하나? 아니면 윌포드처럼 살아야 하나? 이 두가지 상황이란 것은 너무나 명백하잖아요. 오히려 저렇게 우격다짐같은 설교가 듣기 싫어서 생각조차 안하는 사람들이 많겠죠. 그들이 판단을 유보하는 것은이 영화가 난해해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각설하고 여기서 저 희망이라는 것의 정체를 알아볼께요.

봉준호가 세팅한 저 체재는 절망 그 자체입니다. 하층칸의 사람은 바퀴벌레를 먹어야 하고 아이들은 엔진의 부품수리를 위해 공출당해야 합니다. 혁명을 일으킨다고 해도 그 혁명의 지도자가 다시 첫째 칸에 가서 기차를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근본적인 변화를 꿈꿀 수는 없어요. 그래서 차라리 그 체재를 폭발시킬 때 후세는 다른 삶을 살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던지는 희망의 전부입니다. 그 대가는 우리(?)의 후손 두 명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인류의 죽음입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우리는 이런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상황을 "희망"이라고 명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체재의 포기에 대해서 그 기차에 타고 있는 그 누구의 의견도 물어보지 않습니다. 앞깐의 상류층 뿐 아니라 꼬리칸의 사람들에게 조차 의사를 묻지 않습니다. 오직 커티스와 남궁민수, 두명의 결정으로 인류는 두명의 희망(?)을 제외하고 멸망합니다.

그런데 왜 봉준호는 이런 상황을 세팅하고 우리에게 이를 희망이라고 불러달라고 강요하는 걸까요?


3. 지젝과 마르쿠제의 질문, 누가 언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가?


<허버트 마르쿠제>


여기서 우리는 오래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마르쿠제는 마르크스가 혁명의 주체로서 담지한 노동계급이 더 이상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는 현실을 목도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본주의의 아웃사이더야 말로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생산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학생, 지식인, 룸펜, 여성들이 이 새로운 혁명의 담지자로 그로부터 임명됩니다. 물론 그들의 의견은 물어보지 않습니다. 꼬리칸의 인물들이 실제 기차의 생태계를 위하여 노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 주세요. 그들은 이 멈출 수 없는 폐쇄계의 철저한 아웃사이더들입니다. 이들의 일부가 체재내로 편입 될 뿐이죠. 그래서 이들은 이 체재를 부술 수 있는 혁명의 주체로 임명됩니다. 봉준호는 마르쿠제의 주장을 읽었을 겁니다. 그의 전공이 사회학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세요. 적어도 마르쿠제의 저서 몇권은 레포트의 참고문헌으로 있었겠죠. 마르쿠제가 저렇게 막시즘을 비틀 때 마르쿠스가 느낀 것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감이었습니다. 이 점 역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슬라보예 지젝>

이제 마르쿠제보다 더 급진적인 친구를 만나볼께요. 슬라보예 지젝은 자본주의가 멈출 수 없는 자연적 체재가 된 이면에는 심지어 민주주의가 놓여 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이 자본주의질서를 깨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자체를 넘어서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우리가 이전에 도달했던 지점부터가 아니라 ‘처음부터 시작해야만’한다”고 외칩니다. 커티스와 남궁민수 역시 자신들이 닫힌 문을 열어야 한다고 결정할 때 누구의 의견도 묻지 않습니다. 체재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마저 넘어서야 하는 것이니까요.

이 두 주장의 이면에 놓여 있는 것은 새 사회에 대한 희망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목도하고 있는 절망감을 도피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사유체계로 만든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그 유토피아로 도피하려는 행위 아닌가요? 지젝은 오히려 지금 사회를 개선하고자 하는 사유체계가 유토피아주의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의 면면을 세심하게 분석해 본다면 그가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현 사회와 체재에 대한 절망입니다.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라깡과 마르크스의 주장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현 상황에 대한 자신의 증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 아닌가요?

지젝은 그래서 새로운 혁명은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릴 처지”에 놓여있다는 인식이 공유될 때 혁명을 위한 단결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우리는 절망해 있기 때문에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는 자신의 말대로 마르크스 시대의 노동계급이 희망을 위해 일어선 것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어서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므로 즉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봉준호가 세팅한 <설국열차>의 환경은 정확하게 이와 같아요. 그들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 그야말로 희박한 가능성을 위해 체재파괴의 행위를 하는 것은 더 이상 그 체재가 아무런 희망도 주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물론 이 부분에서 각본의 설득력은 대단히 떨어집니다, 과연 그만큼 꼬리칸의 사람들이 절박한가요? 인육을 먹는 것 보다 바퀴벌레를 먹는 것이 더 비참한 것인가요?). 이 체재를 계속 유지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마지막 정체성까지 짓밟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기계가 되어 엔진룸에서 혹사당하는 체재라면 스스로의 인간성을 배제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이 체재를 유지할 바에야 목숨을 잃더라도 차라리 체재를 부수는 것이 낫다는 인식의 공유, 송강호와 커티스가 손을 맞잡은 배경에는 이런 인식의 공유가 놓여있어요. 이는 다른 말로 절망의 공유입니다.

그래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 역시 희망이 아니라 절망입니다. 단, 영화캐릭터의 절망이 아니라 봉준호의 절망. 그는 우리 사회가, 혹은 인류가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4. 무엇이 희망을 가져 오는가?

이 영화가 서사물로서 실패한 지점은 그가 자신의 절망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문을 폭파하고 모두가 죽고 두 아이만 살아남는 극단적인 방법 밖에 없는 상황이었을까요?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모두, 심지어 커티스같이 인간적인 인물마저 하나 같이 체재에 굴복하고 체재에 세뇌되어 체재를 개선시킬 수 없는 존재들일까요? 커티스가 엔진룸을 잡은 후 엔진을 멈추고 선발대를 보내 외계상황을 살펴보는 것은 진정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유토피아와 같은 불가능한 일이었을까요?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위치가 올라가면 지배자로서 군림하기 위하여 기차를 달리게 하는 선택, 그 이상의 것은 할 수 없는 것일까요? 우리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결국 그런 존재에 불과하다면 요나와 티미가 새롭게 만드는 사회가 그 체재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요?

봉준호는 이런 심오한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절망을 전달하는 것에 급급해서 다른 모든 가능성은 잘라 버리고 기차는 탈선을 향해 치닫습니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이며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이 체재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 뿐입니다. 그 후에 어떤 사회가 펼쳐지든 그것이 지금의 체재 보다는 낫다는 것이죠.

누군가는 말하더군요. 봉준호는 자신이 막시스트라는 것을 이 영화에서 고백하고 있다고. 틀렸습니다. 마르크스는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이루어 온 생산력을 바탕으로 인간은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고 이 믿음을 바탕으로 역사는 발전한다고 믿는 사람이 막시스트입니다. 이 사회는 절망 적인 것이므로 모두 파괴하고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막시스트가 아니라 급진적인 혁명가이거나 극좌모험주의자일 뿐입니다. 아나키에 속할 수 있어도 막시스트는 아니란 말입니다. 어찌보면 현실의 공산주의가 처참하게 실패한 지점, 그리고 비인간적인 팽창을 멈추지 않는 현 시점을 목도한 그가 내린 결론은 막시점을 넘어서는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 결론을 우리에게 희망이라고 이름 지어 달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명명자로서 아버지가 되어 달라고 합니다. 죽은 아버지가.

우리가 속한 사회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절망적일까요? 그만큼 한심할까요? 우리 인류는 이 체재를 만드는 것에 1000년을 소비했습니다. 아직도 끊임없이 우리는 서로를 죽이고 있지만 실제 통계를 보면 전쟁과 학살은 줄어들었어요. 불과 반세기 전에 우리는 한 민족 자체를 절멸시키려는 제노사이드를 수반하는 전쟁을 치뤘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서있어요.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인간이 인간 스스로에게서, 그리고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면 어디에서도 희망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에게서 가능성을 찾을 수 없다면 우리에게 후손에게 물려줄 가능성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후손도 실제로는 우리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나는 다시 한번 봉준호에게 묻고 싶어요. 지금 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그 절망에게 희망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 아니냐고.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지고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현실에서, 그리고 우리 스스로의 가슴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면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거냐고.
 


덧글

  • 궁굼이 2013/08/17 21:00 # 답글

    저도 그렇게 느껴지더군요.

    김대중-노무현 시대를 겪어도 대한민국이 안 변하니깐
    그냥 이따위 대한민국 따위 망해버려라.

    라는 악의가 느껴진달까??

    갑자기 사람이 아나키스트가 된 느낌이에요.
  • 코지토 2013/08/18 02:41 #

    ㅎㅎ 설마 확 망해 버려랏! 이러기야 했겠습니까만.... 뭔가 좀 절망의 기운이 엄습해 오더라구요.
  • 지나가다 2013/08/17 23:33 # 삭제 답글

    무려 '희망'이 없다고 닥달해대는 사람들이 그런 책을, 그런 영화를 자본주의 시장애 내다 팔아 자본주의의 열매를 열심히 따먹고 있는 걸 보면 참 기분이 야릇해집니다. 그들이 그 옛날 선자자들처럼 발가벗고 광야에서 외치고 다닌다면 조금은 진지하게라도 들어줄 수 있겠는데, 좋은 집에서 잘 먹고 배 뚜들기며 그런소리를 하고 있는 걸 보자면... 자본주의는 참 관대하구나, 하는 생각만 듭니다.
  • 코지토 2013/08/18 02:42 #

    그거야 체재 내에서야 모두 그렇죠. 설국열차 안에서도 일 안하고 바퀴벌레 먹다가 폭동 일으키잖아요...ㅋ.. 물론 잘 먹는 것은 아니지만 멸망하는 와중에 먹이고 재워주는 것만 해도 어딘가요..ㅋ...
  • 2013/08/18 00:2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코지토 2013/08/18 02:46 #

    이 영화는 서사물로서 실패입니다. 어떤 느낌이냐 하면 예산은 많이 들었지만 자기가 하려는 메시지에 중점을 두고 급히 각본 만들고 급히 각색하고 서둘러서 찍은 느낌. 그러다 보니 전혀 배역과 대사에 유기적인 부분이 떨어져요.
    허지웅은 이 영화에서 그 강렬한 메시지에 압도 당한 거 같아요. 그리고 그 메시지를 중심으로 다시 장면을 재배치 하는 겁니다. 그리고 스스로 최면이 걸리는 거죠. 아, 이 장면은 이 메시지를 강조하는 거구나... 마치 종교에 빠진 사람이 결론에 모든 정보를 맞추는 것처럼.
  • 밀키엘 2013/08/18 01:29 # 답글

    사실 저도 비슷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니 엔진이 고장이 났으면 엔진을 멈추고 그걸 돌릴 에너지로 난방이나 하면 될 것이지, 왜 굳이 열차가 달려야 하지? 그리고, 빙하기가 점점 끝나가고 있다는 '희망'이 있다면, 기차 안에서 조금 더 버티고 있다가 빙하기가 끝나고 나서 나가면 되는데 왜 굳이 지금 모든 것을 무너뜨려야 하지? 커티스가 리더가 된다면 저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 정도는 실행할 힘이 있을 텐데, 굳이 그러지 않고 죄다 무너뜨리겠다는 발상은 사실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보통 다른 사람의 동의조차 없이 목숨을 빼앗는 건 희생이 아니라 살해라고 부릅니다만 이 영화는 그걸 희망이라고 부르니..
  • 코지토 2013/08/18 02:47 #

    그러니까 이 영화는 딱 두가지 선택지를 두고 선택을 강요하게 됩니다. 이 체재 유지할래? 아니면 무너뜨리고 새로 만들래. 아니, 우리가 지금 이분법적인 세계에 사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작품은 우화에 불과한 겁니다. 설득력 없는 우화.
  • Dd 2013/08/18 09:34 # 삭제 답글

    저랑 비슷하게 보셧네요 사람들을 기분나쁘게 선동하는 영화죠 저도 봉준호가 미쳐가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 코지토 2013/08/18 12:06 #

    선동당하면 기분 나쁘지 않고 기분 나쁘면 선동당하지 않는데, 문제는 기분나쁘더라도 영화가 아, 좋다..라는 느낌이 들면 되는데 영화가 별로다라는 느낌이 든다는 게 문제죠.
  • 우주인 2013/08/19 01:52 # 답글

    해석은 사람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한말씀 드리자면 마지막장면에서 커티스가 선택한건 체제의 전복이 아니라 체제밖으로 탈출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됩니다. 남궁민수가 열차밖으로 나가려고 한것도 탈출해서 살기위함이지 인류의 공멸을 원한것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결말에서 열차는 폭파하고 아이둘만 살아남았다는것은 어떻게 설명할거냐라고 물으신다면 딱히 그것에 대해 설명할 뭐가 없습니다. 하지만 감독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도덕성을 상실한 세상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 생각을했습니다. 우화라고 지적하신 것은 상당히 좋은 표현이라 생각이 되는데요, 다만 다분히 긍정적인 시선으로 영화를 본 저에게는 설득력 있는 우화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 코지토 2013/08/19 11:55 #

    네, 영화 내적인 부분은 우발적인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감독이 이런 각본을 짰을 때는 나름 사회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었다는 겁니다. 이런 메시지를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고 읽어 달라고 하니 전 좀 난감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돌려보면 그만큼 강하게 비판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다소 극단적이 상황을 세팅한 것이다..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거 같긴 합니다.
  • 2014/08/21 06:33 # 삭제 답글

    나는 당신이 한 일의 질에 깜짝 놀라게하고
  • 2014/09/11 07:30 # 삭제 답글

    감사합니다 여러분!
댓글 입력 영역



메모장

삶의 불가해성을 위하여
세상을 분해할겁니다.

W 위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