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시간 : 2010/08/09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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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테고리 : 상처 받은 자의 사랑
Prologue
누군가가 말한다.
“코지토님, 연애이야기 하나 들려 주세요.”
“음.. 난 별로 연애를 많이 한 적도 없구... 특별히 할 이야기가 없는데.”
내 답변이 별로 설득력이 없는지 다시 부탁한다.
“하하하, 그럼 이렇게 부탁할께요. 연애 소설 하나만 보내주세요.”
“음... 난 아주 통속적이고 신파적인 이야기 밖에 못할 거 같은데.”
“네, 바로 그거, 그걸 원해요.... 코지토님이 하는 통속적이고 신파 필 나는 연애이야기.”
“좋아, 그럼 연애상담 게시판에 올리는 것처럼, 아주 통속적이고 유치한 이야기 하나 적어볼게. 유치하고 개략적이고 개인체험담 같은 사랑이야기.”
“네, 유치할수록 좋아요. 지금 딱 유치하고 통속적이고 신파섞인 코지토님의 연애담을 들어보고 싶거든요.”
“아니... 연애담이 아니라 소설이라니까. 소설이라고 부르기엔 좀 유치하겠지만.”
“하하하, 네, 아무렴 소설이겠죠. 아무튼 들려주세요.”
이 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아마도 더 큰 이야기의 일부가 될 거 같다. 전혀 통속적이지 않고 신파적이지 않고 그래서 더 재미가 없는 더 큰 이야기속의 이야기.
1. 문자 메지시 한 줄
“어떻게 지내? 문득 생각나서........”
단 한 줄의 문자. 휴대폰에 이 문자가 울리고 번호가 뜨는 순간 순간적으로 시야가 흐려지는 거야. 헤어 진지 5년이 지났지만 전화번호를 너무나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거든. 심박이 올라가고 순간 호흡도 잠깐 멈추는 것 같았어. 어떻게 해야 할까? 웃기는 거 있지. 그 애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거든. 아이도 한명 있다고 들었고. 그런데 문자를 받고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건 정상이 아닌 거잖아.
답장을 보냈냐구? 아니, 보내지 않았어.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3일째 그냥 이렇게 보고만 있는 거야. 그냥 지우려고 몇 차례 삭제 버튼에 손을 올렸지만.............. 지울 수가 없었어. 지금 여자 친구가 이 문자를 본다면? 하긴 그냥 친구라고 둘러대면 그만인데 별 생각이 다 나면서 신경이 쓰이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전화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거야. 읽는데 일초도 안 걸리는 이 한줄 문장을 한자 한자 세면서 수백 번은 읽은 거 같아. 정말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문자를 보낸 걸까? 문득 생각났다는 말, 정말일까? 한 동안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그 아이의 생각에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는데, 그 애는 그냥 오늘 한번 문득 내 생각이 난 것일까? 내 번호는 지우지 않은 걸까?
2. 첫 만남 - 방안에 일렁거리던 그녀의 아름다움
3일 망설이다가 답장 보냈어. 그냥 간단하게.
“난 잘 지내. 너도 잘 지낸다고 들었어. 문자 늦게 보내 미안. 너무 놀라서 좀 망설였어.”
그냥 이렇게만 보냈어. 그리고는 오늘 하루 종일 휴대폰만 보게 되더라. 일이 손에 잡혀야 말이지. 그런데 오후까지 연락이 없었어. 문자가 들어왔다는 신호가 울릴 때마다 화들짝 놀라 문자를 봤지만 대부분 스팸 메일. 틈만나면 휴대폰을 보면서 나는 먼 곳, 어딘가에서 휴폰을 바라보며 문자를 누르는 그녀를 생각했어. 가늘고 긴 손가락. 그 손가락은 휴대폰 문자판 어딘가를 망설이는 표정으로 방황하고 있는 거 아닐까? 그러다가 결국은 문자판을 누를 힘을 얻지 못하고 다시 휴대폰을 내려 놓는 거 아닐까? 휴대폰을 바라보는 그녀의 차갑고 모호한 시선. 아마도 아래 입술, 왼쪽 아래 입술을 깨물고 힘없이 휴대폰을 들고 있겠지. 그래, 답신은 보내지 않아도 괜찮아. 잘 있는 모양이구나. 다행이야. 답신 안 보낼 수있을 만큼 잘 지내고 있어서.
그러나 가슴 아래가 욱씬 하면서 아려왔어. 마지막 그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만 묻고 난 뛰어서 그녀에게서 달아났었거든. 그녀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리고 다시 연락하지 못했어. 아마도 수천마디 수만 마디의 말을 했을 거야. 그날, 그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다시 단어를 조립하고 문장을 구성해서 그녀에게 말하곤 했어. 아무 소용없는 줄 알면서. 그 수천 수만 마디의 말들의 무게를 다 합해도 오늘 내가 받은 한 문장의 무게에 백만분의 일도 되지 못할 것들. 그 많은 말들을 담은 채 뒤돌아 서서 뛰던 그날의 나. 백만번은 더 그날의 나를 후회했을 거 같다. 그날의 그 장면에서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는 나를 수십번은 더 꿈에서 봤을 거 같다. 꼭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뭘까.
외로움과 가난함. 내 어린 시절을 구성하는 두 단어. 돌이 지나자 말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전혀 경제능력이 없으셨어. 그래서 난 늘 어두운 방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며 혼자 지내곤 했어. 그 어두운 방을 가득 채운 건 아버지가 남기고 간 수많은 책들. 한글을 따로 배우지 않고 어머니가 읽어준 동화책을 들으면서 대략 한글을 읽을 수 있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난 어릴 때부터 어두운 방 구석에서 아버지가 남기고 간 책들을 읽으면서 어머니를 기다리곤 했어. 뜻도 모르면서 늘어진 단어와 문장들을 보면서 외로움과 슬픔을 이겨내야 했어. 그러나 어머니는 도저히 나를 키울 수 없어서 친지가 운영하던 복지시설에 위탁하시고 외국으로 가셔야 했어. 낯선 곳, 그리고 험한 곳에서 감내해야할 정서적 충격은 어린 내가 이겨내기에는 너무나 힘들었던 것 같아. 그래서 더욱 책 속으로 숨어 들었어. 문자와 단어와 개념과 추상. 그 안에서만 나는 행복할 수 있었던 거 같아. 현실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친 것이었으니까. 다행히 공부를 그럭저럭 한 덕에 지방대학이지만 전면장학금과 기타 조건을 받으며 들어갈 수 있었어.
슬픔과 외로움. 이 두 가지는 내가 숨겨야 할 내 본질이었어. 그래서 늘 더 크게 웃고, 더 많이 말하고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준비하곤 했어. 학생회와 편집국, 그리고 독서토론, 영화동아리. 이 네 가지 역할이 내가 연기하던 가면의 모습. 그럼 저 활동들이 다 가면 쓴 거짓이었냐구? 아니, 그런 말이 아니야. 암울한 내 유소년기를 보내면서 내가 겪은 문제의 본질을 사회적인 해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어. 고등학교때 이미 꽤 많은 맑시즘 관련서적을 읽었고 진학한다면 꼭 학생회활동을 하겠다고 결심했거든. 그리고 문학과 영화는 내가 현실을 피해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유일한 도피처였고. 다만 그 안에서의 인간관계에서 내가 보여준 모습은 가면을 쓴 모습이었어. 가능하면 유쾌하고 즐거운 얼굴만 보여주고 싶었어. 누구도 내가 경험한 외로움, 슬픔을 이해할 수 없을테니까.
그런데 정말 삶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더라. 그냥, 별다른 이유 없이 서로 좋아하게 되는 그런 일. 나처럼 정말 별 볼일 없는 인간도 누군가 있는 그대로 좋아 해 주는 그런 기적 같은 일. 운명 같은 사랑? 지금 돌아보면 그런 건 아닌 거 같아. 보다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표현해보자면 서로의 상처 자국이 비슷해서 함께 만났을 때 그 상처자국이 퍼즐처럼 맞아 들어가는 그런 인연?
누군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줄 거라고 생각해 보지 못했어. 물론 지금은 좀 달라. 제법 틀도 갖추었고, 남들 보기에는 그래도 평범한 직장인 모양은 나잖아. 하지만 대학 다닐 때에는 정말 최소한의 모양새만 갖추고 다녔던 거 같아. 학생회에, 아르바이트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틈나면 책읽고 영화보러 가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어. 가끔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영화이야기 책 이야기 나누는 것이 그때 내가 누리던 거의 유일한 즐거움이었어.
그러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우울과 슬픔이 문득 찾아올 때가 있었어.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나 혼자 방안에 처박혀 있곤 했는데 그러다가 그나마 한 가지 해결책을 찾았어. 혼자서 캄캄 한 영화관에 숨어들어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보는 거야. 까마득한 어둠, 그리고 어둠을 가르는 영상의 빛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흩날리는 은금색의 먼지들. 그래, 어둠을 가는 빛살 앞에서는 먼지조차 저렇게 가끔 반짝이잖아. 내 삶도 저런 먼지처럼 덧없이 날리는 조각이지만 한번 정도는 어둠 속을 비추는 빛에 반사되어 반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했어. 내 삶을 구축하는 시간의 입자들이 우울한 어둠 속에서 저 먼지처럼 부유하고 있는 것이라면 언젠가는 빛살에 반짝일 날도 있겠지.
그런 반짝임이 어느 날 문득 찾아오더라. 크리쉬나뮤르티가 한번은 그렇게 이야기 했어. 삶은 거대한 신비라고. 정말 자신의 온 존재가 원하는 일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도 이루어 지는 거라고.
창문 사이로 찾아드는 햇살이 청소 안한 어두운 내방을 가르고 방안에 퍼지던 먼지들이 반짝거리던 어느 날. 우리 동아리가 자원봉사행사를 준비하고 있었어. 난 동아리 전회장 겸 고문이라서 실질적으로는 거의 리더역할을 하고 있었고. 자치방에서 다들 모여서 이것저것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동아리 아이들 중 참가를 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모이곤 했어. 그 아이는 2학년 학기가 다 끝나갈 무렵 갑자기 가입한 거야. 보통 2학년이 가입하는 경우가 잘 없잖아? 그러니 좀 특이한 케이스였어. 키 크고 얼굴이 작고, 큰 눈에 긴 머리, 누가 봐도 눈에 띄는 스타일인 아이였어. 그 아이가 의외로 자기도 행사에 참여하게 해달라는 거야. 리본도 잘 만들고 장식품도 잘 만든다고. 좀 의외였어. 영화나 문학을 좋아해서 동아리에 든 것은 이해 가는데 이런 행사에 참여할 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거든. 그런데 열심히 장식품도 만들고 풍선도 불면서 분위기를 참 밝게 만드는 거야. 남자들이 많이 따라다닌다고 들었는데 남자친구가 누군지 복 받았네, 는 생각을 했지.
밤 늦게까지 일해서 밤참 먹이고 난 뒤에 차 있는 후배들이 차 태워주고 몇 명은 조 나뉘어서 택시타고 그렇게들 헤어졌고 난 방으로 오자마자 곯아 떨어졌어. 눈 떠보니 한 9시 쯤이었나? 갑자기 휴대폰이 울리는 거야. 누구지? 받으니까 그 애 목소리였어.
“선배, 저예요. 저 렌즈세척액을 잊어버리고 갔는데, 좀 가지러 갈께요.”
누구지? 아......... 얘가 웬일이지? 난 잠이 덜 깨서 그냥 그래, 그래... 하고 대답했어. 그리고 여기저기 둘러보니 어제의 폐허 더미 옆에 작은 파란 병이 하나 있었어. 이건가? 헉, 방이 이런데 여길 온다고? 아, 진짜, 그냥 월요일 준다고 할 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이런.............. 일어나서 씻고 옷 갈아입고 방을 좀 치우려고 준비하는데 30분이 못 되어 벨이 울리네. 뭐가 이렇게 빨라? 문을 열자말자 그 애가 들어서더니 막 웃는 거야.
“이럴 줄 알았어. 선배, 같이 치워요.”
그러더니 마구 청소를 하기 시작 하는 거다. 이런.............. 사람 무안하게........
“내버려둬. 내가 오후에 치울 건데.”
“같이 해요. 어차피 오늘 약속도 없고 저 시간 많아요.”
그러면서 뚝딱 뚝딱 물건들을 치우고 방을 쓸고 분주한 것이다. 멍하니 혼자 바쁘게 움직이는 그 애를 바라고 보고 있는 수밖에.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 그런 나를 보더니 그 애는 가볍게 눈을 흘기면서 말한다.
“아, 쓰레기 봉투라도 좀 사오세요. 뭐하세요? 멍하니.”
그러더니 다시 부지런히 손발을 움직이며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 하는 거야.
“아, 쓰레기 봉투? 그래.... 사올게. 큰 거 필요하겠지?”얼른 가게로 뛰어가서 음료수와 쓰레기 봉투를 사서 오니 어느새 바닥은 정리가 대충 되어 가고 있었다.
아, 정말 잘 하네? 생긴 거하고는 다른걸? 남친이 정말 복 받은 거 맞네.
그애는 바쁜 손 움직임으로 1시간만에 청소에 설거지 까지 다 하고는 쇼핑백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볶음밥 만들어 왔어요. 선배, 아침 절대로 안 해먹는다면서요?”
“누가 그래? 나 요리 잘해.”
“라면 잘 끓이는 건 알죠.”
아, 진짜.......... 얘가 왜 이렇게 사람 무안하게 만들지? 정말 뭘 어찌해야 할 줄 모르겠더라. 내 방에 여자아이랑 단 둘이 있어본 것이 처음이라서 도무지 안절부절 할 수밖에. 그런데 얘는 너무나 태연하게 상을 꺼내서 설거지한 수저랑 차려 놓는 거야.
“드세요? 왜, 맛없을 거 같아서요? 볶음밥 싫어하세요? 내 비장의 무기인데.”
“아니, 그럴 리가........ 난 싫어하는 거 없어. 개고기 뱀고기 이런 거 빼고.”
자리에 이겨 못 이기는 척 한 술을 삼켰다. 어라? 맛있네? 배 고픈 김에 그냥 얼른 한 도시락을 싹 비웠어.
그리고는 이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차분하게 가면을 골라서 뒤집어 쓴 거야. 자신 만만하고 지적이면서 유머러스한 선배놀이 페르소나. 자주 사용하고 또 잘 먹혀서 가장 자신있는 나의 페르소나. 그리고는 태연한 영화이야기를 늘어놓고 당시 유행했던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 이야기도 늘어놓았어. 재미있어 할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잘 알아듣고 좋아하는 거야.
눈을 반짝이며 그 애가 말했어.“자주 느끼는 거지만 선배는 참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풀어서 이야기 해줘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어요?”
“내가? 잘 모르겠어. 그냥 재미있게 읽은 책은 나도 모르게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 있나봐.”
밥을 다 먹고 이제 할 이야기도 떨어지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안절부절 하게 되는 거야. 지금쯤 일어나서 가주면 좋을 텐데 왜 계속 앉아있을까?
“너, 바쁘지 않아?”
“안 바쁜데요? 아까 약속 없다고 이야기 했잖아요. 밥 먹었으면 커피도 먹어야죠. 커피 끓일게요.”
뭐지? 뭐야? 도대체?
태연하게 커피 물 올려 놓고 싱크대 옆에서 잔을 꺼내서 봉지커피를 꺼내는 그 아이의 옆얼굴에 내방 싱크대 앞의 작은 창으로 오후의 햇살이 비추어 들어왔어. 가르마를 타고 포니테일을 한 채 몇 가닥 얼굴선과 나란히 내려오는 머리카락, 그 머릿결을 밝은 갈색으로 만드는 햇살, 하얀 볼 위의 솜털위로 산란하는 빛살과 반쯤 아래를 향한 눈 위로 단정하게 흐르는 짙은 눈썹. 늘 예쁜 아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새삼 숨 막힐 만큼 예쁜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그 옆얼굴은 선명하게 가슴에 박혀있어서 언제라도 생생하게 떠 올릴 수 있어. 아, 정말 예쁜 아이구나, 나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 거린 거야. 그러자 갑자기 가슴이 뛰는 거야. 이런, 이건 또 뭐지?
잠시 정신없이 그 아이의 옆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돌아 서서 나를 향해 오는 거였어. 화들짝 그 아이의 시선을 피해 서가의 책이라도 보는 양 시선을 돌렸지.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심장 고동소리가 들릴까봐 너무 무서웠어. 쿵쿵 거리지 마라. 제발 좀.
“선배, 커피 마셔요.”
커피 잔을 상에 올려놓더니 그 애가 갑자기 내 옆으로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아 침대에 기대어 앉는 것이었어. 그 순간 그나마 유지해 오던 선배놀이 페르소나가 깨져버린 거야. 놀라서 벌떡 일어나 버린 나. 아, 이건 아닌데.......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그 아이에게 뭐라도 둘러 대기 위해 횡설 수설 말을 꺼냈어.
“아, 나 잊어버리고 있었네. 오늘 도서관에서 명석이 만나기로 했어.”
그 애는 약간 생뚱맞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면서 말하는 거야.
“아, 그랬어요? 같이 갈래요? 나도 명석이 선배랑 친한데.”
“아니, 아니, 오늘 좀 정말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다고 했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약속이 몇 시인데요?”
“두시, 아....... 세 시구나.” 두시라고 말하고 보니 이미 시계가 두 시를 지나고 있어 다시 말을 바꾼 거야. 거짓말도 순발력이 있어야 잘 하지. 평소 임기응변에 강한 편인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짧게 친 옆 머리에서 식은땀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어. 등에도 열이 나 화끈 화끈 거리고 있었고. 붉어진 얼굴을 혹시 들킨 거 아닐까? 다리까지 떨리는 느낌이었어.
“그럼 시간 좀 있네요. 커피 마시고 가요.”
“커피? 아, 그래, 커피.”
난 그 애가 조금 전에 앉았던 자리로 가서 마주 앉아서 허급지급 커피를 마셨어. 그리고는 얼른 나가야 한다고 채근하여 겨우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어. 다른 곳에 들렀다 가야해. 뭘 가져 오라고 했거든. 뭘 가져 오라고 했는데요. 아........ 별 거 아냐. 뭐....... 누구 빌려준 책이래. 그런데 그걸 왜 선배가 찾아다 줘야 해요? 아....... 그러니까.......... 내 친구한테 빌려준 책이거든. 아, 힘들다.......... 그냥 좀 넘어가 주지, 왜 이렇게 꼬치꼬치 묻는 거야?
이쯤 읽었으면 알겠지만 이 후로 나와 이 아이가 이 연애담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그리고 이 에피소드로 인해 곤욕을 치러야 했어. 그것도 두고두고, 아주 오랫동안. 대략 아래의 내용을 몇차례 변주해서 때로는 한번에, 때로는 나누어서 혼나고 욕 얻어 먹고, 또 혼나고 또 욕 얻어먹고.
“명석이 선배하고 약속 좋아하네요. 언제 약속했는데요? 그날 동아리방에 아침부터 가서 회지 편집해야 한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무슨 남자가 그렇게 둔해요? 렌즈 세척액 때문에 남자 방에 가는 여자가 어디 있어? 그거 몇 푼이나 한다고. 뭘 두고 오면 좋을까, 고민하고 일부러 눈치 챌만한 것을 두고 왔는데....... 그리고 또 옆에 앉는다고 벌떡 일어나 도망치는 남자가 어디 있어?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대요? 진짜 사람 자존심 상하게....... 눈물 나오는 거 억지로 참은 거 알아요?”
그때마다 나는 몇 번이고 같은 변명을 되풀이 해야했어.
“미안해. 렌즈 세척액이 얼마나 하는지 몰랐어. 난 렌즈 안 끼니까 모를 수도 있잖아. 그리고 도망친 게 아니라....... 좀 당황한 거뿐이야. 너 같이 예쁜 애(!)가 갑자기 다가오면 당황할 수 있잖아.(뒤의 능청스러운 문장은 나중에 하기 시작한 변영임을 염두에 둘 것)”
“명석이 건은 정말 잘못했어....... 갑자기 당황해서 뭐라도 둘러 댈 말을 찾다가 말이 헛 나온 거야. 일어났으니 일어난 핑계를 만들어야 하잖아. 원래 사람 심리가 그런 거래. 일이 벌어지면 그때부터 이유를 찾는 거래.”
그러면 또 자주 아래와 같은 답변을 들어야 했어.
“됐고, 정말 기분 나빴거든요? 어쩌면 버스 타는 곳까지도 바래다주지도 않고 진짜 도서관으로 가는 인간이 다 있어. 웃겼어 정말. 책도 안 들고 도서관에 가서 도대체 뭐 한 거람. 아니, 진짜로 웃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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