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선언

저는 보수입니다.

1. D마이너급 좌파

내 정치지향을 언젠가 D-급 좌파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김규항이 B급좌파라고 이야기한 것에 빗대어 한 말이다. 스스로 좌파지향이라고 하지만 자본주의세계에서 살아가는 이상 자본주의가치를 상당히 내재화 했고 그 가치에 익숙해 있음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심성의 많은 부분은 자본주의 가치를 거부하고 보다 인간중심적인 사회구조를 만들고 싶다는 이상을 지향하고 있다. 현실과 이상의 지향점, 이 괴리 속에서 분열되는 스스로를 보며 나는 자신를 D-급 좌파라고 규정했다.


2. 규정짓기 놀이

이 나라에서 인터넷을 하다보면 늘 남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노빠, 꼴통, 페미, 꼴페미, 마초, 된장녀..... 이 수많은 레이블들. 난 이 수많은 레이블 중에서 언제나 극과 극을 오갔다. 누군가에게 나는 노빠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책상물림 좌파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페미로,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페미를 줄세우기하는 좌파마초로 규정당하곤 했다.

그들은 왜 이렇게 타인을 규정하기를 좋아할까? 왜 타인이 자신과 좀 다르다고 느껴지면 그 반대극으로 몰아붙이고 딱지붙이기 놀이를 할까?

딱지 붙이기 놀이를 보면서 문득 그들의 불안감을 깨닫곤 한다. 타인에게 딱지를 붙이면 편하다. 더이상 소통하지 않아도 되니까. 왜 소통하지 않으려 할까? 그들과 소통하면 내 정체성이 불편해 지니까. 그들을 반대극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래, 저 녀석은 마초니까, 저 녀석은 노빠니까, 그래 저 녀석은 페미니까 저 녀석의 논리는 들을 필요가 없어. 설사 논리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필요가 없지.

농담같아 보이지? 하지만 며칠 전 내 글에 붙은 어떤 리플은 이런 논리를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너무도 당당하게 내 글은 타인의 칭찬을 동냥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주장을 카피한 것에 불과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 논거는? 다른 사람들이 '현상'을 '시스템'으로 파악하는 주장을 이미 했기 때문이라는군.  농담인걸까? 부모가 반대하는 사랑이야기를 하면 몽땅 로미오와 줄리엣의 표절이 되는건가?

정말 농담같아 보이는 이 이야기를 태연자약하게 내뱉을 수 있는 이유는 내가 '페미'를 '줄세우기' 한 적이 있는 마초이기 때문인 모양이다. 화자의 '진영'에 따라 그가 말한 것의 진리치는 변한다.  다른 진영에 속한 인간이 맞는 말을 할 리가 없으니까. 그 자신이 속한 진영은 항상 옳으니까.



3. 광신과 배타

정체성이 허약할 때 흔히 우리는 광신을 지향하게 된다. 믿쑵니다라고 수없이 되뇌는 신자들의 외침을 들을 때 마다 나는 그들의 허무한 신앙의 밑바닥을 들여다 보게된다. 끝없는 이단사냥을 벌이는 신자들의 행위를 볼 때마다 허약한 신심의 끝이 결국은 광신으로 치닫는 원동력임을 본다.

타인을 배제하고 배타하고 타자화하며 스스로는 그들과 다른 무리라는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안심하는 것이다. 물론 그 타자화의 전투에 참여하는 '동지'들의 격려는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된다. 그 격려가 있기에 오늘도 누군가는 지하철 안에서 '불신지옥, 예수천당'을 외칠 수 있는 것이다. 혹은 그들의 격려가 있기에 태연자약하게 그들은 자신과 다른 이들을 향해 맹렬하게 이단선고를 내린다. 저들은 악마이며 저들은 괴물이야. 

농담같이 들리지? 그러나 난 며칠 전에 어떤 이들이 얼마전까지 인터넷에서 토론을 주고 받던 다른 이들을 인간성이 파괴된 괴물이라는 이야기를 태연하게 주고받으며 히히덕 거리는 것을 보았어. 왜 괴물이냐구? 자신들에게 반대하니까. 결코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할 뿐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더군. 더 슬픈 것은 그들은 스스로를 '진보'라고 믿고 있다는 거.
 
수없는 자기최면의 끝에서 그들이 발견할 것은 그들만의 오롯한 천국일까? 그들의 천국에 필 한점 티없이 새하얀 백합화를 위하여 건배.


4.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로지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라고 이야기 하더군. 그러나 그들에게는 회색이 없어. 오로지 흰색과 검은 색이 존재할 뿐. 잰 노빠라는 검은 색, 난 좌파라는 흰색, 혹은 잰 마초라는 검은색, 나는 페미라는 흰색.

모든 이론이 회색이라면 흰색과 검은 색만을 인식하는 저 색깔감각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회색은 생명의 색이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회색을 이해하는 자는 자신이 아직 생명의 나무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레닌이 파우스트의 말을 되뇌였을 때에는 아마도 자신의 이론도 혹은 다른 누군가의 이론도 '세계'라는 것의 실체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절절히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흑백만으로 구분된다고 믿는 사람은, 흑백에도 농담(濃淡)이 존재하며 두 색 사이에도 끝없는 회색의 계조가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의 실체가 이론으로 표현될 수 없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그에게는 회색의 이론조차도 없으니까.  


5. 따뜻한 회색을 위하여

스스로를 들여다 본다. 나는 때때로 이기적이고 나는 때때로 마초적이고 나는 때때로 혁명적이고 나는 때때로 보수적이기도 하다. 하루에도 수백번 스쳐가는 상념들이 모두 나라면 나는 수천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 모든 상념들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그 어느 것으로도 규정되지 못한다. 그 어떤 색으로도 규정되지 못하는 나를 어찌 한가지 색으로 표현 할 수 있을까?

모든 색을 섞으면 검은 색이 된다. 모든 빛을 섞으면 하얀색이 된다. 흑과 백을 섞으면 회색이 된다.  어떤 색에도 속할 수 없는 스스로를 회색이라고 이야기 하련다. 하지만 차갑지 않은 따뜻한 회색이 되고 싶다.

뜨거운 것은 좋지만 타인을  꼴통이라고, 마초라고 외치는 그런 종류의 뜨거움을 가질 바에는 조용히 차라리 차가운 회색에 머물고 싶다. 뜨겁게 사랑할 수 없다면 차라리 미지근해 지는 것이 낫다고 믿는다.

P.S. 언젠가 어떤 지인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한 정당을 하나 만들면 어때? 열린당의 비판적 지지자와 민노당의 비판적 지지자들을 위한 그 중간의 어떤 당 말이야.
장사가 될까? 
수요야 틀림없이 있을텐데....
하지만 다른 정치자영업자들이 빈틈을 주지 않을테니 파고들어갈 틈이 없을거야. 걍 인터넷 세력이 될 뿐이지.
그래.... 그래도 우리같은 이들을 위한 정당이 있으면 좋을텐데 말이야.   

by 코지토 | 2006/05/30 19:10 | 시사분해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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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Zannah at 2009/05/30 22:46
상대에게 딱지를 붙임으로서 타자화하여 자기 정체성을 지킨다라... 인상깊은 말씀입니다.
Commented by 코지토 at 2009/05/30 23:50
감사합니다. 우연히 이글루 홈에서 님의 좋은 글을 보고 문득 예전에 써 두었던 글이 생각나 포스팅하면서 트랙백 하였습니다. 시간나면 자주 찾아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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