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명록입니다.

안녕하세요. 코지토입니다.

날씨가 벌써 쌀쌀 합니다.

사무실 아래층, 차갑도록 맑은 햇살 아래 아이 한명이 울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팔짱 끼고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네요.

한 5초간 두 사람의 사이에는 시간이 멈춘듯 모든 것이 얼어 붙어 보입니다.

창문을 열고 문득 시야에 들어온 광경.

이 가을 날의 기억이 아이의 마음에 짐이 되지 않았으면.

아마도 그 아이는 이날을 기억조차 못하겠지만

누군가는 사무실 위에서 가을 날의 한 조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슬픈 일이 될지라도.

P.S.
공론사이트가 구축되었으며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주소는 www.theacro.com 입니다. 많이들 방문해 주셨으면 합니다.

by 코지토 | 2010/05/19 03:26 | 트랙백 | 덧글(60)

보는 것과 쓴느 것

 
                                 
<Carolos Castaneda>



돈 후안은 언젠가 지자(知者, a man of knowledge)는 자기가 선호하는 것이 따로 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달라고 하였다.

“내가 선호하는 것은 보는 것이라네.”그가 말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지.” 그가 말했다. “지자는 보는 것을 통해서만 알 수 있기 때문일세.”

“어떤 것을 보는 겁니까?”

 "모든 것.”

“하지만 나는 지자가 아닌데도 역시 모든 것을 보는 걸요.”

“아니. 자네는 보는 것이 아닐세.”

“나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정말이지, 자네는 보지 못하네.”

“돈 후안,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요?”

“자네는 단지 사물의 표면을 볼 뿐이지.”

“그렇다면 지자들은 모두 자기가 바라보는 것을 실제로 전부 꿰뚫어 본다는 뜻입니까?”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닐세. 자자는 자기가 선호하는 것이 있다고 자네에게 말했지. 내가 선호하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인데, 그럼으로써 나는 알게 되네.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것을 행하지.”

“예를 들면, 어떤 것들이 있죠?”

“싸까떼까(Sacateca)의 예를 들어볼까? 그는 지자인데 그가 선호하는 것은 춤추는 것이라네. 그래서 그는 춤을 추며 알게 되지.”

“지자가 선호하는 것이란 그가 알기 위하여 행하는 그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그래, 그 말이 맞네.”

“그렇지만 춤추는 것이 어떻게 사까떼까가 무엇을 알게 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이렇게 생각해 보세. 그가 춤추는 것은 자네가 춤추는 것과 같다기 보다는 내가 보는 것과 같다고 할까?”


          -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또 하나의 현실(A Separate Reality) 중에서



아는 것은 어쩌면 무언 가를 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안다는 것은 무언가를 전적으로 알아가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두 가지 상태로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하며 더 이상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는 상태. 또 하나는 무언가를 알기 위하여 온 마음을 열어서 어떤 것을 알아가고 있는 상태.

안다는 것과 기억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안다는 것은 현재 진행 중인 상태를 나타내며 기억한다는 것은 한 때 그것이 어떠했는지를 고정시켜 떠 올리는 것. 그리고 때로는 기억은 무엇인가를 아는 상태를 방해한다. 어떤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어떤 것에 대하여 배우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그 어떤 것은 항상 변해간다. 이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고정되어 있다고 믿는 기억 이외에는. 하지만 기억 그 자체도 우리의 체험과 인식이 달라짐에 따라 변해간다. 둔감한 우리는 그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백지위에 자신을 풀어넣는 작업이다. 그 작업이 가져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이해다. 우리는 자신을 잘 알고 있을까?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할 뿐이지, 실제로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도 끊임없이 변화되어 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우리의 기억과 그 기억을 떠올리는 인식의 주체 아닐까? 그리고 그 인식의 주체라는 것은 신경과 신경의 연합으로서 작동하며 신경과 신경의 연합은 주변의 자극에 따라 끊임없는 섬광을 반짝이며 변화되어 가는 것 아닐까?

지금 이렇게 글을 타이핑 하는 동안 나는 변해 간다. 조금 전에 맛있게 먹은 삼겹살과 밥과 된장이 소화되어가며 삼겹살은 종이위에 글자로 변해간다. 그 작업의 과정에서 나 역시 변화된다.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을 인식하고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 대하여 더 잘 알게된다. 나라고 규정되어진 존재가 이렇게 끊임없이 변해가는 존재였던 것이다.

돈 후안은 말한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보지 않는다고. 사실 그렇다. 우리는 진정으로 사물을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들 자신도 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체계로 조건지어지고 그 조건 속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인식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조건지어 졌는지,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돈 후안은 지혜로운 사람이므로 사물을 보는 것만으로 아는 상태로 나아간다. 아마도 그는 사물을 보는 자기 자신 역시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의 변화를 적어 두자. 종이위에 기록하는 그 순간들을 끊임없이 이어지게 만들자. 그 상태야 말로 무언가를 알아가고 있는 상태일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고 예수는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 진리는 신에 대한 진리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에 대한 진리가 아닐까?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진리를 아는 상태로 있는 자만이 자신의 정신에 얽매여진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자신을 종이 위에 풀어 놓는다. 스스로에 대하여 알기 위하여. 

by 코지토 | 2009/11/22 23:56 | 자투리들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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